시사&설說

[정민의 世說新語] [347] 처정불고 (處靜不枯)

유유(游留) 2016. 2. 3. 22:07
명나라 도륭(屠隆)의 '명료자유(冥寥子游)'는 관리로 있으면서 세상살이 눈치 보기에 지친 명료자가 상상 속 유람을 떠나는 이야기다. 그는 익정지담(匿情之談)과 부전지례(不典之禮)의 허울뿐인 인간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토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익정지담은 정을 숨긴, 즉 속내를 감추고 겉꾸며 하는 대화다. 그 설명은 이렇다. "주인과 손님이 큰절로 인사하고 날씨와 안부를 묻는 외에는 한마디도 더하지 않는다. 이제껏 잠깐의 인연이 없던 사람과도 한번 보고는 악수하고 걸핏하면 진심을 일컫다가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원수처럼 흘겨본다. 면전에서 성대한 덕을 칭송할 때는 백이(伯夷)가 따로 없더니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등지는 말을 하자 흉악한 도적인 도척(盜蹠)과 한가지다."

부전지례, 즉 전아(典雅)하지 못한 예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손님과 얘기할 때 신분과 관계없이 친한 친구 사이라도 종일 고개 숙여 머리를 조아린다. 하늘과는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날마다 멀어지고, 땅과는 어찌 그리 친한지 날로 가까워진다. 귀인이 한번 입을 열기라도 하면 우레 같은 소리로 '예예'하고, 손만 한번 들어도 머리가 먼저 땅에 조아려진다."

웃는 얼굴로 입속 혀처럼 굴어도 속내는 다 다르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은 하늘과 땅 차이다. 대화는 철저한 계산속에서만 오간다. 이익이 되겠다 싶으면 배알도 없다. 세상 사람이 저 빼놓고 다 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이 정작 남보다 더한 속물이다.

그렇다면 어찌할까? "나는 이렇게 들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고요함 속에 지내면서도 버썩 마르지 않고[處靜不枯], 움직임 속에 있어도 시끄럽지가 않다[處動不喧]. 티끌 세상에 살면서도 이를 벗어나 얽맴도 풀림도 없다." 고요 속에서 깊어지는 대신 무미건조해지고, 활동이 많다 보니 말까지 많은 인간이 된다면 거기에 무슨 깨달음이 깃들겠는가? 속내를 감춘 대화, 굴종을 강제하는 갑을 관계, 먹고살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유토피아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저무는 한 해 앞에서 지난 시간이 문득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