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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장구 장단에 너울너울

유유(游留) 2016. 2. 9. 07:01

활장구 장단에 너울너울

 

 

설날 아침이 되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꼭 이런 주의를 주었다.

 

“오늘 하루는 모두 몸조심, 말조심들 혀야 한다. 절대 말다툼이나 싸움을 허면 안되여. 오늘 쌈질을 허거나 다투면 일년내내 재수가 없게 되니께, 알았제.”

 

아이들에게 꼬까옷을 입히며 몇 번이고 다짐을 주곤 했다. 그만큼 정월 초하루의 하루 생활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낸 아이들이 새 옷을 입고 서리가 하얗게 깔린 논배미로 나가 오랜만에 사 입은 새 옷들을 뽐내기 시작하면 뒷산 느티나무에선 꼭 까치들이 울었다. 지금이야 옷이나 양말이나 신들을 아무 때나 샀지만 옛날엔 설에 옷 한 벌 추석에 옷 한 벌을 사면 그걸로 일 년을 지냈다. 새 옷과 새신과 새 양말에 얽힌 집안 내력들은 각기 다르지만 추억들은 모두 같을 것이다. 모두 춥고 배고프던 지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명절다운 명절이었고 어버이가 자식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애정이 뚝뚝 넘치던, 모자라서 안타까워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인간의 시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40대 이상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가슴 짜한 추억이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 번지는 추억,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 설레는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정성껏 장만한 옷과 음식을 자식들에게 입히고 먹이는 부모들은 작년보다 훌쩍 큰 자식들을 보며 대견하고 뿌듯해하며 몸조심 말조심을 다독거렸다.

 

어머니들은 초사흘이 자나도록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집안에서 지냈다. 세배 온 사람들에게 음식상을 차려주거나 장만해둔 음식을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초사흘 아침이 되면 간단한 음식으로 사흘제를 지냈다. 초사흘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어서 보통 때도 제사 지내는 집이 많았는데 우리 집안도 꼬박꼬박 제사를 지냈다. 초사흘 제상은 어머니 머리모양처럼 아주 깔끔하고 정갈했다.

 

초사흘 제사를 지낸 어머니는 동백기름 바른 반질거리는 낭자머리를 단정히 빗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으셨다. 그리고 빳빳하게 다려둔 앞이 넓적한 무명 앞치마를 두르셨다. 그러고 나서 작은 상에 정성껏 음식을 차린 후 까치동 조각 상보로 상을 덮어 큰집으로 가져가셨다. 큰집엔 할머니가 계셨던 것이다. 단정히 빗은 머리에 깨끗하고 하얀 무명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가 음식을 가지고 큰집으로 종종걸음 치시는 모습은 참으로 산뜻해 보였다. 눈이라도 쌓인 설엔 그 모습이 더욱 이뻐 보였다. 하얀 눈길위에 오랜만에 꺼내 입은 색동 치마저고리와 옷고름은 늘 새로웠다. 그렇게 옷차림을 한 어머니들이 이 고샅 저 고샅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모습은 정월 초사흘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가난하지만 어른들을 생각하는 정초의 마음은 그 차림새만큼이나 그 걸음새만큼이나 맑고 고왔던 것이다. 그 모습들을 보면 세상이 다 살아났던 것이다.

 

음식은 꼭 친척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먹은 어른께 음식을 갖다 대접하고 세배를 드린 어머니 들은 초사흘 밤부터 이 집 저 집을 돌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깊은 밤까지 놀았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활장구였다.

 

진메마을에는 장구가 한 채밖에 없었다. 징도 한 개 꽹과리 두 개, 이렇게 꼭 필요한 풍무만 가지고 있었다. 농기도 영기고 날라리도 대포수가 가져야 할 나무로 만든 총도 없었다. 잡색의 여러 가지 복장도 없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잡색을 만들면 되었다. 각각 한 조씩밖에 없는 풍물들은 아무 때나 내 돌리지 않았다. 더구나 장구는 아주 중요하고 비싼 악기이기 때문에 아무 때 아무에게나 내주지 않았다. 아무리 정월 노는 때이고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허가받은 밤놀이지만 장구는 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허가받은 날들을 마냥 앉아서 이야기만으로 지낼 수 없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야 했다. 남정네들이야 맨날 이 판 저 판에서 몸과 마음을 풀었지만 여자들이야 쌓인 피로를 푸는 때는 정월뿐이었던 것이다.

 

노래하고 춤을 추려면 악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것이 활장구였다. 활장구는 말 그대로 활로 만들어 치는 장구이다. 활은 대나무나 닥채로 만든다. 활줄은 아무 실이나 되는데 기왕이면 삼으로 꼰 것이 좋다. 팽팽하게 활을 만든 다음 부엌에서 쓰는 바가지 위에 활등을 대고 손가락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활줄을 위아래로 가볍게 퉁기면 금방 당글당글 소리가 나온다. 노래나 춤가락 박자에 맞추어 퉁기면 훌륭한 악기가 되었다. 춤가락 장단을 칠 줄 아는 사람이 활장구를 치면 더욱 좋다. 바가지가 없으면 설 쇠려고 창호지를 깨끗하게 바른 문에 활등을 대고 퉁겨도 덩글덩글 당글당글 훌륭한 소리가 나온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흥겨운 가락이 되어 나오는 활장구 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머니들의 그 밝은 얼굴과 춤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방안 가득 앉고 선 어머니들의 모습과 윗목 쌀가마니나 선반에 얹혀진 호롱불의 너울거림은 크고 부드러운 춤사위를 만들어냈다.

어머니들은 때로 낮에도 어느 집에 모여 활장구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냈다. 그러다 보면 설 음식들은 거의 바닥이 나고 설과 보름이 후딱 지나 일철이 코앞에 닥쳤던 것이다.

 

 

58-61 쪽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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