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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처럼 느리게 걷는 길

유유(游留) 2016. 4. 10. 13:46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 전기 주전자에 물을 받아 플러그를 꽂습니다. 선반에서 인스턴트커피를 꺼내고 찻숟가락을 찾아 머그잔에 한 술 덜어놓으니 물은 벌써 요란하게 다 끓었습니다. 이때부터 손이 바빠집니다. 물을 붓고 크림병과 설탕병을 찾아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부지런히 떠 넣고는 휘휘 젓습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찻물을 끓이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커피 잔에 커피를 넣고, 설탕과 크림을 다 넣은 후에도 주전자에서 물이 팔팔 끓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슬슬 김을 내뿜기 시작하는 주전자를 들여다보며 가만히 서 있기도 했고, 한가로운 창밖풍경에 넋 놓고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급합니다. 서둘러 물을 끓이고 서둘러 커피를 타서, 하던 일을 계속하며 후루룩 커피를 마십니다. 하다못해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를 붙잡고 떠들기라도 해야 시간을 알뜰하게 쓴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속도가 붙은 대신 여유는 사라졌고, 생활은 조금만 느려져도 왠지 불안해합니다.

 

우리가 오래오래 걷고 싶은 길은

느릿느릿 소들이, 뚜벅뚜벅 말들이 걸어서 만든 길

가다가 그 눈과 마주치면 나도 안다는 양 절로 웃음 터지는 그런 길

느려터진 미소도 팔랑팔랑 나비도

인간과 함께 하는 소박한 길

그런 길이라네

 

- 허영선, (우리가 걷고 싶은 길은) 중에서

 

 

제주도에서 ‘올레’는 집 앞의 작은 골목을 뜻 합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올레길에 대한 비슷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것입니다. 집안 어른에게 실컷 야단을 맞은 후 밖으로 뛰쳐나와 웅크리고 앉아 있던 곳 , 눈물을 뚝뚝 떨구며 무작정 걸어다녔던 옛 골목에 대한 추억 말입니다.

 

 

서러워서, 화가 나서 걷기 시작했는데,

그 길을 돌아올 때쯤이면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고

마음은 스스로 정화 되었습니다.

그저 타박타박 걷기만 했는데도 말입니다.

 

 

사시사철 푸른 들을 지나 오름에 오르면 들판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지각색 천을 이어 붙인 듯 알록달록한 풍경은 마음을 빼앗아가선 도무지 놓아줄 생각을 안 합니다. 내 마음이 자연이고 자연이 내 마음입니다. 걸으면서 고뇌를 벗어놓으려 했지만 생각은 이미 바다 저쪽, 들판 저 너머로 사라져 남아 있질 않습니다.

 

올레길을 걸을 때는 어서 빨리 걸어라고 앞사람을 재촉해선 안됩니다. 그 길을 마치 경주하듯 서둘러 걷는 이들도 있지만 올레길은 그리 걸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제주 말 중에는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레길은 간세다리처럼 느리게, 놀면서 쉬면서 걷는 길입니다. 70리 앞바다 불 밝힌 갈치 배들을 보며, 나와 싸우던 내 안의 다른 나와 천천히 화해하며 걷는 길입니다. 느린 걸음일수록 더 따뜻하게 서로를 껴안을 수 있습니다.

 

 

내 걸음이 느려지면

바람도 뒤에서 나를 따릅니다.

하늘의 구름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급히 재촉하며 살아도

늘 모자라기만 했던 시간이,

풍성하게 늘어나 나를 기다립니다.

 

 

 

게으름뱅이처럼 느리게 걷는 길

송정림 -감동의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