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힘 들어도 당신이 있다면

유유(游留) 2019. 5. 23. 22:32

힘들어도 

       당신이 있다면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버스를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다.

정류장이라고도 할 것 없이 노란 표지판만 덩그러니 서 있는 그곳에서 한참 동안이나 버스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갈 길은 먼데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고, 발 딛는 곳 어디에서나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슬 기다리는 마음은 왠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미루나무 잎사귀 소리에 귀가 가고,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을 눈이 따랐습니다.

‘뭐, 그냥 이대로 좀 있지, 뭐’ 하는 생각에 초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렁설렁 시간은 흘러갔고, 그러다 보니 멀리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달려왔습니다.

도시에서는 그렇게 자주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조급해서 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게 되는데, 시골에선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조금도 급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선 기다리는 그 몇 분 동안 녹초가 되어, 버스에만 올라타면 앉을 자리부터 찾았는데, 시골 버스에선 누가 탔나, 사람들 얼굴부터 살펴봅니다. 확실히 덜 지칩니다.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들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며 풀고 싶은 마음조차 귀찮을 만큼 혼자 지쳐갈 때, 이철수 씨 판화를 들여다봅니다.


미술 작품은 빈 공간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됐다고들 하지만 판화가 이철수 씨의 작품은 채워진 공간보다 빈 공간이 더 많습니다. 채우려다 그만둔 듯, 꽉 찬 공간보다 여백이 더 많은 판화, 그래서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합니다.


시골 버스 정류장처럼 조용하고 다정하게 ,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다며 다독거립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간결한 선에 담아낸 그의 판화들은 전혀 인위적이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그중에서 이렇게 쓰인 판화를 들여다봅니다.



당신은 힘들지요?



당,신,은,힘,들,지,요...., 


이 일곱 글자가 쓰인 판화 속에는 고개를 외로 꼰 채 한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농부의 일감 같은, 어쩌면 살아온 날들의 흔적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인생의 과제 같기도 한  짐더미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습니다.

무엇을 하다 지쳐 고개가 저토록 옆으로 기울어진 걸까 궁금합니다.


“당신은 힘들지요.....,”



또 다른 작품에도 눈길이 갑니다. 동그란 원 속에 등이 굽은 할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걷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인생은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 그래도.....,



그래도 ..... 그래도 .... , 그다음엔 무얼 말하려고 했을까요?


살아가는 일이 두려울 때,

용기가 없어지고 힘이 빠져 도저히 혼자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을 때,

‘그래도’ 나를 지탱해주는 인연들

‘그래도’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사소한 근거들

그래도... 그래도.....


펑펑 울고 싶던 나를 썰렁하게 웃기던 농담 한마디,

마음이 쓸쓸한 때 불어주던 휘파람 소리,

열 때문에 펄펄 끓는 이마에

걱정스럽게 얹히던 서늘한 손,

힘든 내게 더 힘든 그가 건네던 말


“많이 힘들지?”.........,


그렇게 아주 작고 따뜻한 마음들을 떠올려봅니다.

문득 마음 깊은 곳 한구석에

작은 불씨가 따닥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감동의 습관/ 송정림  114-11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