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출신이라고 좌파 진보의 도장이 찍혀 태어나지 않듯이
대구 사람들이라고 우파 보수로만 태어날 리는 없다
최보식 선임기자
유승민 의원 상가(喪家)에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가 등장했을 때다. 그는 "대구에서 택시 서너 번만 타보면 대구 민심을 알 수 있다. 내가 초선일 때는 대구 의원들 7명이 물갈이됐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실 그의 지역구(區)도 대구다. 이런 말을 할 형편이 못 된다. 하지만 자신은 물갈이 대상이 아니라 물갈이의 칼자루를 쥔 쪽이라고 여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 계급에 속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신라 골품제로 치면 '진골(眞骨)'쯤 될 것 같다.
유승민 의원 지역구에 도전장을 던진 이재만 전 동구청장도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올곧게 모시고 '배신의 정치'를 응징하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일꾼이 되겠다"고 출마 선언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충성 서약이다. 이렇다 보니 대구 현역 의원들은 뒤늦게 유승민의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중이다.
의정 활동이 시원찮거나 자질이 떨어지면 공천 과정에서 현역 의원들을 물갈이해야 한다. 그런 숫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여당이나 특정 지역 의원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대구에서 '뜨거운 뉴스'가 됐다. 이 도시에서만 대통령의 '배신'과 '진실한 사람'으로 물갈이가 현실화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청와대 출신 등 대통령의 사람들은 오직 '박근혜 어록(語錄)'을 높이 받들고 대구로 몰려들 태세를 갖추고 있는 중이다.
국정 운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통령은 속상할 것이다. 민생 법안을 엉덩이에 깔고서 묵혀 두고 있는 국회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 지역 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진실한' 사람으로 물갈이를 해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어차피 새누리당에 표를 찍어온 대구 사람들로서는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들로 바꿔준다고 생각하면 큰 의미를 둘 것도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안 먹혀도 대구는 항상 대통령을 따르는 미덕을 보여 왔다. 이번 총선에도 대통령의 사람들을 결국 당선시켜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대구에서 말 안 듣는 의원들을 다 날려버리는 'TK 맹주(盟主)' 노릇을 하는 게 옳은가, 아버지 박정희 시절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대구 사람들은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인가, 자존심도 없는가 따위의 말은 아직 크게 들리지 않는다.
대구는 박 대통령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통령이 항상 옳고 국민 편에 서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대통령이 여전히 불쌍하게 보이며 핍박받는 존재다. 이성과 합리의 눈으로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힘들 때가 있다. 때로는 맹목적 편애(偏愛)가 사랑하는 상대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걸 대구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령 이명박 정부 때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됐다. 박근혜 의원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의 반대는 국가적으로 옳지 않았다. 하지만 '경상도 DJ' 같은 지지 기반을 가진 그를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제 그의 국정 운영에서 세종시는 가장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행정 낭비와 비효율은 이미 충분히 지적됐다.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 지지는 결국 그 본인에게 독(毒)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을 사랑한다면 때때로 그를 긴장시키는 게 옳다. 대통령이 불만의 폭발에 쏟는 시간보다 야당과 반대파들에 협력을 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 권력 게임보다는 대통령 자리에서 추구해야 할 국가적 업무에 집중하라고도 말해줘야 한다. 그게 대구의 역할이다. 무슨 일을 벌여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 기반이 있으면 대통령은 전제적(專制的)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새누리당이 '기득권 정당'으로 비판받을 때마다 대구는 기득권 지역처럼 통해 왔다. 호남 출신이라고 좌파 진보의 도장이 찍혀 태어나지 않듯이 대구 사람들이라고 우파 보수로만 태어날 리는 없다. 대다수 이 도시 사람들은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과 중산층이다. 부(富)의 양극화에서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게 요즘 대구 사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도시 사람들은 마치 가진 자들이고 완고한 기득권 세력처럼 비쳤다.
현 정권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출세한 대구 인사들이 꽤 있겠지만, 정작 대구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권 덕을 보고 특급 혜택을 누렸을 리는 없다. 일 년에 서너 번 대구를 갈 때마다 늘 동대구역 앞에서 100m 이상 끝없이 늘어선 빈 택시의 줄을 본다. 그 광경이 대구의 무기력처럼 다가와 슬픈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대구 사람들은 지금껏 이 모든 걸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래서 대구 출신인 나는 새삼스럽게 묻는 것이다. 대구가 그런 곳인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시사&설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필친교 [不必親校] (0) | 2016.03.18 |
---|---|
[130] 애여불공(隘與不恭) (0) | 2016.03.11 |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 마지막 편 (0) | 2016.03.09 |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10편 (0) | 2016.03.09 |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9편 (0) | 2016.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