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설說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10편

유유(游留) 2016. 3. 9. 15:34

10 산업화 시대를 이끈 가장들의 우울증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최근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요즈음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부모님이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느냐?“ 는 조사를 했더니 대다수 젊은이들이 ’아버지는 65세까지 살았으면 좋겠고, 어머니는 75세까지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누가 지어낸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 이유가 더욱 기가 막혔다. ‘아버지는 벌어놓은 돈 다 쓰지 말고 되도록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고, 어머니는 10년 정도 더 살아서 손자 손녀 돌봐주고 집도 봐주고 청소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효孝 사상이 깊은 나라였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에서는 효를 찾을 수가 없단 말인가?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늘 ‘효’를 강조했다.


‘부모님께 효도해라.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효는 만행의 기본이다. ’

이런 말을 거의 매일 귀가 따갑게 들었다. 우리 세대에는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小學소학 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효행’편 첫 소절은 기억하고 있다.


“부생아신父生我身, 모국오신母鞠吾身,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다.”


이 소절이 얼마나 무섭게 머리에 꽂혔는지 거의 DNA속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부모님께 효도하며 평생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의무이자 인간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무도 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부모님을 모실 생각을 안 한다. 오히려 거꾸로다. 자식이 부모에게 자기 인생을 책임지라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제조물책임법, 이른바 PL(Product Liability)법이라는 것이 있다. 제조업체는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결함이 있는 제품을 제조, 유통시켜 소비자에게 피해를 발생시켰을 경우 손해배상의 책임을 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2004년 PL 법이 우리나라에 도입 되었을 때 사회는 ‘소비자주권 시대의 개막’ 이라며 무척 반겼다.


그런데 이 PL 법이 부모자식 간에도 적용이 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 아닌 가 착각할 정도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  부생아신 모국오신 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하는 세상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낳고 기른 사람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자식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니 키우는 것은 물론 교육이며 미래까지 부모가 모두책임 져야 하고 노후에 덕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 같다.


요즘 부모들을 봐라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고생 시작이다. 예쁜 옷과 신기한 장난감을 갖다 바쳐야 하고, 영어 학원에 보내야 하고 바이올린 학원에 보내야 하고, 노후자금 다 털어서 조기유학이며 언어연수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부모가 자기를 낳았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책임이란다. 제조물 책임법이 부모자식 간에도 발효된 것일까?


이에 대해 부모들은 아무 말도 못한다. 아이들 말이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원 보내 달라, 유학 보내 달라 떼를 쓴 게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서, 자기들이 안달이 나서 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를 천명으로 배우고 자란 산업화 세대는 그저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면 다 잘 될 줄만 알았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이 알아서 우리 아버지 대단하다고 존경할 줄 알았다. 열심히 일해서 조국 근대화와 가난 탈출에 이바지 하면 은퇴하는 대로 아이들이 모셔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이제 은퇴한 산업화 역군은 자기 영역을 잃었다. 즉, 동물 세계로 치면 수놈들이 영역을 잃은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수놈들의 번식기가 지나 영역 표시를 할 수 없으면 얼마나 비참해 지는 가 .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버림받아 굶어 죽던지 , 혹은 다른 동물에게 잡혀 먹히든지 아니면 스스로 무리를 떠나 사라져야 한다.


산업화 세대 가장들도 늙기 전에는 자기 영역이 있었다. 직장에 가면 자기 책상이 있고, 직함이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목에 힘주며 영역 표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힘이 있기에 집에 와서도 영역표시를 할 수 있었다. 돈을 벌어서 먹여주고 키워주고 가르치니까 영역 표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어버린 가장들은 밖에 나가도 자기 영역이 없고 집에 들어와도 자기 영역이 없다. 온통 아이들 눈치, 며느리 눈치, 손자 손녀 눈치만 봐야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이제 여성부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계 사회로 변하고 있다. 호주제도 없고, 엄마 성을 따를 수도 있으며, 재산은 공동 명의이다. 은퇴한 가장(숫놈)은 이제 천덕꾸러기 일 뿐이다. 아이들이나 손자 손녀들도 엄마나 할머니만 좋단다. 아무도 힘 빠진 아버지나 할아버지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가장들은 이렇게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모두 너무 바빠서 아이들에게 효에 대해 말해줄 시간도 없었고, 아이들 DNA속에 효를 입력시킬 시간도 없었던 우리의 불찰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이런 노래에만 미쳐 살았던 우리의 잘못인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 라도 스스로 영역표시를 할 방도를 강구할 수밖에.........













[세발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 서사현  지음  중에서..]


[http://cafe.daum.net/uusanbang] 유유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