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에게 말을 걸다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한 영화 <블라인드>는 북유럽의 설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홀로 걷고 있습니다.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 아득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눈밭을 뚜벅뚜벅 걸어 오래된 성에 도착합니다. 소년 루벤이 사는 곳이었죠. 루벤은 조각상처럼 곱게 생겼지만 앞을 보지 못해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날카롭고 난폭했죠. 상처는 마리아에게도 있었어요. 온 얼굴이 긁힌 자국이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 때문에 생긴 거이었습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데 ‘너무 못생겨서 꼴도 보기싫다’라며 어머니가 마리아의 얼굴을 거울에 들이박았어요. 부딪히며 깨진 거울의 파편이 얼굴에 박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갖게 되었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고 동작에도 기품이 있었지만 성격은 뾰족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고요.
낮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루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가 들어서자 나가라며 꽃병을 던졌죠. 마리아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상처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또 다쳐서 흉터가 생긴다고 해도 어차피 그다지 달라질 것도 없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루벤 이었습니다. 끄떡도 하지 않고 받아 내다니 놀라운 일이었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루벤이 먼저 다가갔습니다. 처음에 의연함에 끌렸고 다음엔 향기에 끌렸으며 이후에 냉정함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혹되었습니다. 관심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어요.
루벤은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몇 살인가요? ”
거짓말을 했던 것을 보면 마리아 또한 루벤에게 끌리고 있었던가 봅니다. 실제로는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스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루벤이 다시 묻자 마리아는 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금발, 빨간 입술을 가졌다고 답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낳아준 엄마조차도 혐오하던 얼굴이었으니까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또래의 여자를 생각하며 루벤은 사랑에 빠져들었습니다. 성큼 다가서는 루벤을 마리아는 밀어내지 못했죠. 두 사람은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보고픔이 간절해졌어요. 루벤은 망설이던 눈 수술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루벤의 어머니도 동의합니다. 둘이 헤어지길 바랐으니까요. 둘의 관계가 못마땅했던 어머니는 마리아의 늙고 못생긴 얼굴을 보고 나면 루벤이 사랑을 멈출 거라 생각했습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난 루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시력을 회복한 다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가 깜쪽 같이 사라지고 없었으니까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싶어 도망쳤던 겁니다. 루벤은 좌절했고 다시 난폭하던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어디 가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신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심지어 얼굴조차 모르는데. 괴로워하던 루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긴 여행을 떠납니다.
온 세상을 떠돌며 마리아를 찾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소득이 없었죠. 지쳐서 돌아온 고향. 거기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랑을 두고 멀리 떠날 수가 없었던 거죠. 시내의 도서관에 들렀다가 루벤은 사서로 일하고 있던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루벤은 향기를 기억했어요. 익숙한 향기를 쫒아가며 루벤은 마리아의 이름을 외칩니다. 마리아는 숨고 도망쳤어요. 그녀를 쫒아가며 루벤은 말합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얼굴이 아니고 그냥 당신이니까 제발 피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마리아는 루벤에게 돌아갔을까요? 영화의 끝은 모호합니다만. 봄이었어요. 차가운 얼음의 땅이었던 루벤의 성에 봄이 찾아왔죠.
초록이 무성하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루벤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행복한 듯 웃는 얼굴이었지만 실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스스로의 눈을 찔렀으니까요. 아마도 마리아가 자기 곁에 편안히 머물 수 있길 바라서였겠죠. 아니면 그녀가 제발 돌아오길 바랐거나.
사랑이란 어차피 눈이 머는 행위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스스로 기꺼이 눈이 머는 일. 그러니 무엇이 걱정인가요. 조금 바보 같아도 예쁘고. 바보 같아서 더 예뻐 보이는 것이 사랑인데.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보여주세요. 정말이지 왜 망설이나요? 눈이 머는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데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방황하며 놓치고 말 건가요.
걱정을 접고, 사랑을 믿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진짜로 이제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랑에 눈이 머는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데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방황하며 놓치고 말 건가요.
걱정을 접고 , 사랑을 믿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 봐요, 우리.
가져온 곳 [다시 , 사랑 정현주 지음 스윔밴드 2015. 3. p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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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나를 보다.]
다시,사랑....
흘깃 지나며 판매대의 책 중 하나 제목이 스쳐간다.
한 두 발자국 간 걸음이 다시 돌아선다. 선 듯 책을 집어 들어 예의 그 파라락 거리는 소리와 인쇄 냄새가 성큼 다가서는 책장을 열지 못한다.
책의 제목에서 느끼는 그 큰 소리는 순간 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돌아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쿵’ 소리를 내며 걸음을 그 앞에 붙여버린다.
시내 서점 가에 하릴없이 서성이다 이 책을 처음 본 순간이다. 오랜 나이를 가지고 다시 사랑이란 말에 가슴이 내려앉다니..
머릿속엔 성큼, 내가 지금 몇 살이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 소리에 항변이라 하듯이 책에 스르르 손을 뻗는다.
책 서문에 작가의 변이 있다.
오랜만에 작가의 말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래 ...
오랫동안 잊고 살아 온, 사랑이야기 ...
다시 한 번 훔쳐보자.
내 나이에서 훔쳐보기만 할 뿐..
훔칠 엄두는 미리부터 포기한 채 누가 볼까
얼른 품에 안고 집으로 온다.
아름답고 안타깝고. 힘들고 불쌍하고 . 웃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서가에 얹어두고 잊고 있었다.
다시 이 책을 세세히 읽을 생각을 그때는 했을까...
요즘 나는 다시 이 책을 안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의 어느 모티브에서 장단을 추고 있는가.. 어느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고 맑은 웃음으로 다시 사랑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한 두가지 어려운 게 아닌 화두지만 그래도 작가는 연신 사랑을 이야기를 해 준다. 빨리 다가서서 손잡으라고...
2019. 5. 20. 오늘 비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