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나뭇짐 위에 진달래꽃가지

유유(游留) 2016. 3. 19. 17:20

나무꾼에 얽힌 이야기는 ‘나무꾼과 선녀’ ‘나무꾼과 포수’ 등 많기도 하다. 그만큼 나무꾼이나 나무가 살림살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지난 시절엔 모두 나무를 쌓아두는 ‘나무청’ 이 있었다. “나무가 없을수록 장작을 때라”라든가 “양식 없다 부엉 나무 없다 부엉” 등의 옛말이나 옛 노래도 나무가 그만큼 중요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시골에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해먹는 사람이 있겠지만 거개의 집들은 이제 나무로 밥하고 국 끓이고 떡하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진메마을에 나무해서 밥해 먹는 집은 한 집도 없다. 이제 집들이 다 부석짝(아궁이)이 없어져버리고 모두 입식 부엌에다 가스로 연료를 삼고 난방은 석유보일러로 하게 되었다.

 

  옛날의 마루나 광방이 없어져버리고 느닷없이 썰렁한 알루미늄 창문이 자리를 잡았다. 이쁜 창호지 문은 사라지고 유리창이 달렸으며 눈이 왔는지 비가 오는지 이제는 문을 열거나 문틈으로 볼 것 없이 커튼만 걷으면 되는 것이다. 방안에서 손가락으로 스위치만 살짝 돌리면 방바닥이 따뜻해 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은 손 안 대고도 얼마든지 코를 풀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70년대까지 시골의 연료는 모두 나무였다. 산에 나무나 풀이 나무꾼에 의해 남아나지 못했다. 봄에서 가을까지 자란 나무나 풀은 겨울에 어김없이 땔감으로 베어져 아궁이로 들어갔다. 시커먼 아궁이가 저 앞산 뒷산 나무와 풀을 다 잡아먹고 입만 쩍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땔감의 종류는 많다. 겨울철이나 이른봄에 나무를 여유있게 해놓지 못한 집에서는 여름에 보릿대를 때는데 불꽃은 그리 싸지 않다. 겨울철에 짚을 때는 집도 있지만 진메마을에서는 극히 드문일이고 아마 큰 들녘에나 있는 일일 것이다.

 

  왕겨도 땔감으로 사용했다. 대개 작은 풍로를 사용해 불을 땠는데 풍로의 바람구멍 위에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 풍로를 서서히 돌려가면서 왕겨를 조금씩 뿌리면 된다. 왕겨로는 군불을 많이 땠다. 어느 해이던가 우리 집에서 부엌 아궁이에 왕겨를 가득 넣고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었는데도 불이 붙지 않아 있는 힘을 다해 풍로를 돌렸더니 갑자기 아궁이 속에서 불이 붙어 펑 소리가 나며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확 나오는 바람에 내 눈썹이랑 앞머리가 다 그슬린 기억이 난다.

 

  땔감으로 제일 좋은 나무는 뭐니뭐니 해도 장작이다. 그중에도 소나무 장작이 으뜸인데 그 장작을 패서 마루 밑이나 헛간에 가지런히 쌓아두면 무척 풍요로워 보였다. 아버지는 욕심이 많아서 남 못지않게 장작을 많이 패서 보기 좋게 쌓아두고 아껴가면서 때곤 하셨다.

6.25 때 우리 동네는 한 집도 남지 않고 모두 타버렸다. 장작은 6.25가 끝나고 우리 동네에 산판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있었지만 산에 소나무들이 모두 베어지고 난 후에는 장작이 사라져버렸다.

 

  장작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른 땔감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좋은게 ‘싸잽이’였다. 싸잽이는 일년 동안 자란 잡목이나 풀을 싸잡아 베어 묶은 것인데 불 때기도 좋았고 잘 마르지 않아도 되었다. 싸잽이는 네 다발이 한 짐이었다. 그 다음으로 치는 것이 ‘풋나무’이다. 풋나무는 풀나무라고도 하는데 나무를 잘 하지 못하는 아낙네들이나 애기 지게를 지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묶기도 쉽고 가볍기 때문에 일이 수월했던 것이다. 강변에서 이런 풋나무를 많이들 했다.

 

  그 다음은 1,2년생 정도의 잡목을 낫으로 베어서 네 다발씩 묶은 것이다. 이 나무는 청년이상이 되어야 했다. 이 나무를 가장 솜씨있게 하는 분은 길홍이 당숙이었는데 사람들이 감자먹고 똥싼 것처럼 매끈하다고 했다. 이 나무를 제일 헤싱헤싱하게 한 분은 얌쇠양반과 병재였다.

그 다음 아직 장작감이 못되는 ‘동대’라는 나무가 있다. 팔뚝만한 크기의 나무를 2미터 정도의 길이로 잘라서 짊어졌다. 장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싸잽이리고 하긴엔 너무 컸다. 이 나무는 깊고 높은 산에 가야 있어서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땔나무는 ‘닥채’였다. 닥채는 껍질을 벗겨낸 닥나무의 노란 가지였는데 이 나무야말로 가장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닥무지(닥나무를 삶는 일)가 있는 날, 닥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닥무지에서 닥나무를 꺼내면 서로 한 다발이라도 더 맡으려고 생난리였던 것이다. 거의 날마다 쌈이 났으며 악을 쓰고 의가 상하는 일도 많았다. 닥채는 떡을 하거나 여름에 못밥을 하거나 찰밥을 할 때 땔감으로 쓰였으며, 베를 짤 때 도투마리(실을 감는 기구)에 실을 감는 데도 쓰였고, 새집 지붕을 이는데도 쓰였으며 집을 지을 때 흙 바르는 벽에 엮기도 했다. 불땀이 좋고 여러 곳에 쓰이니, 서로 한 다발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싸움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껍질은 주인이 가져가고 닥채는 벗긴 사람의 몫이었다.

 

  닥채다발을 묶어 바람이 세게 불어오는 북쪽에다 쪼르르 세워놓으면 방풍막이도 되었다. 닥채다발은 내가 순창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유일한 땔감이었다. 봄철이 되면 아버지는 닥채 다발을 우차 가득 싣고 순창까지 40리 자갈길을 오셨다. 이 닥채 서너 개만 가지면 밥 한끼를 거뜬히 해냈다. 여름엔 좋았는데 겨울철엔 방이 얼음장이었다. 아, 그 시꺼먼 양은솥단지, 눈보라 몰아치는 부엌, 썰렁한 밥, 신 김치 단지.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그렇게 그 닥채로 밥을 해먹었다.

 

  나무 중에 가장 때기 좋은 것은 가리나무이다. 가리나무는 솔잎 떨어진 것인데, 소나무 밑에서 갈퀴로 긁었다. 불 때기도 좋고 불땀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솔가리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소나무가 거의 없었기에 솔가리는 아주 귀해서 부잣집이나 읍내에서 주로 사용했다. 순창 사람들은 40리 길을 걸어 갈재까지 이 나무를 하러 다녔다.

 

  또 밤나무잎을 긁어모아 때기도 했다. 밤나무잎은 금새 타버리는게 단점이지만 그래도 땔나무가 귀한 곳에선 좋은 땔감이었다. 이 밤나무 잎을 긁어 깍짓동을 만들어 지고 강을 건너던 아버지는 어느날 바람이 세게 불어 강물에 이 나뭇짐과 함께 쓰러진 적이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 사람들이 이 나뭇짐을 지고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들이 너무도 눈에 선하다. 바람을 잘못 타서 나뭇짐과 함께 강물에 더러 빠지기도 했을 뿐 아니라 고추룰 지고 오다 빠져서 강물에 벌겋게 고추가 떠가기도 했다.

 

  밤나무잎을 부엌에다 갖다놓고 때다 불이 날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내가 늦게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부엌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연인즉, 어머니가 군불을 때다가 바로 뒷집인 작은집으로 물을 길러 갔단다. 마침 작은어머니가 계셔서 물동이를 인 채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만 깜빡 군불 때다 온 것을 잊어버리신 것이었다. 한참 후 물을 이고 와서 부엌에 가보니 ‘어머나떠머나’ 아궁이의 불길이 차츰차츰 부엌바닥에 놓인 알밤나무잎으로 옮겨 붙고 나무 헛청까지 다가가 붙었더란다. 겁이 난 어머니는 엉겁결에 머리에 이고 있던 물동이의 물을 그냥 부엌에 부어버렸단다. 다행이 불이 그리 많이 붙지 않아 금방 꺼졌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고 하신다.

 

  나무들이 산에서 다 동이 나자 사람들은 찔레나무나 꾸지나무 등 가시 달린 나무까지 해댔다. 가시가 달린 나무를 할 때는 외손에 가죽으로 장갑을 만들어 끼었다. 축구공 찢어진 것이 아주 안성맞춤이었는데 나중에는 갈담 장에서 가죽으로 된 왼손 장갑 한짝만 팔기까지 했다. 그후 동네 사람들도 점점 도시로 떠나버리고 산에 사방(砂防)공사가 잘되어 나무가 커져 숲이 우거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탄을 때기 시작하고 석유 곤로가 들어오게 되면서 나무꾼이 사라져서 이제 ‘나무꾼과 선녀’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 중의 전설이 돼버린 것이다.

 

  나무를 많이 해서 땔 때 제일 무서운 게 산림계 직원이었다. 산림계 직원은 세무서 직원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농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산림계 직원이 어느 집에 들어간들 나무로 불을 때는 농촌 사람들의 꼬투리가 안 잡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진메마을에서 산림계 직원에게 걸려 벌금내거나 밀주 해먹다 들켜 벌금 낸 적은 없었다. 세무서 직원이나 산림계 직원이 오면 이장네 집에 닭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씨암닭 잡아 말 그대로 ‘푹 삶으면’ 다 해결되었다.

 

  나무 중에서 제일 하기 쉬운게 바작나무(바작에다 하는 나무)였다. 용식이. 나, 복두, 용조형은 유난히 이 나무 하기를 좋아했다. 방학이 되면 공부고 뭐고 다 뒷전이고 날 좋으면 무조건 지게에다 바작 얹고 도끼 짊어지고 산이나 가까운 밭가로 나무를 하러 갔다. 용식이나 나는 싸잽이를 하기가 힘들었다. 나무를 해서 다발 묶기도 여간 힘든게 아니었고 또 짊어지기도 힘이 들었다. 상당히 이력이 붙어야 나무다발을 솜씨 있게 묶어 허물어지지 않게 짊어질 수 있었다.

 

  바작나무는 오래 전에 베어간 나무 밑동(등걸)을 도끼로 패서 하는 나무였다. 베어간 지 오래 된 나무 밑동을 도끼로 패면 뭉텅뭉텅 장작처럼 떨어졌다. 이 등걸을 바작 가득 담아다가 마루 밑에 쌓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마루 밑에 가득 쌓아두고 쇠죽 끓이거나 군불 땔 때 사용했다.

 

  이제 나무꾼도 사라졌다. 우리 동네 나무를 하는 집은 지금 태환이형네뿐이다. 그 집 굴뚝에선 지금도 밥할 때 연기가 난다. 쇠죽을 끓일 땐 다른 집들도 물론 나무를 땐다.

점심 때가 되면 구불구불 실낱같은 산길을 줄줄이 내려오던 긴 행렬의 나무꾼들. 징검다리에 모여 웃통을 벗어부치고 땀을 씻던 그 건장한 청년들의 어깨 위의 짚 자국, 그리고 엎드려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 달디단 강물은 이제 없다.

 

  봄철이면 진달래꽃가지를 꺽어 나무집에 꽂고 산길을 줄줄이 내려오던 나무꾼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봄산엔 소쩍새 울고 진달래 핀다. 아이들 키보다 작은 다북솔 위로 폴짝폴짝 뛰어 도망가던 토끼나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던 노루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 되어도 저녁이 되어도 연기가 오르지 않는 적막한 저물녘 마을을 보면 서럽다. 나뭇짐 부리고 부엌에 달려가 바가지에 떠마시던 찬물이 생각이 난다. 쇠죽솥 아궁이 가득 벌겋게 장작불이 타고 솥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고 아이들이 그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었지. 그 아궁이들이 꽉꽉 막히고 사라지고, 집 어디선가 펑 하고 석유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퍼런 불이 나오는 가스레인지에서 밥이 끓어 치치치 김을 뿜는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해버린 것이다.

 

  어제의 일만 같은 저 추억의 진달래꽃가지 짊어진 나무꾼들이 줄줄이 내 가슴에 달려오는데, 더운 김을 푹푹 뿜으며, 김 나는 어깨를 자랑하며.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산문집/ 69- 76쪽/ 창비 1997.4.30

 

 

 


 

 

그저께..

영산강 자전거 길을 가기위해서 순창을 거쳐서 갔었지요..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시 담양 순창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갈 때도 깜깜새벽 이었고 집으로 올 때에도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또 고속도로를 진입하기 위해 어두운 순창 동네를 지났습니다. 문득 여기서 진메 마을이 멀지 않은데... 다음엔 금강자전거 길을 가지 말고 오랫동안 김용택 시인의 진메 마을.. 덕치를 가보려고 별렀는데.. 지척에 있는데..

다음 종주길은 섬진강으로 가보자고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오늘 아침..

이틀이나 지났는데 회사일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몸에 이상 신호가 자꾸 와서...

스트레스로 피곤했던가 봅니다.

어제 밤 일찍 잠자리에 들어 푹 자고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지요.

그리고 식사를 기다리면서 소파에 앉아 난잡한 TV를 보고 있자니..

뭔가 칙칙 소리가 나고 잠시 있다가 ‘밥을 저어주세요’.. 쿠쿠.. 뭐시기 거시기 기계소리가 들립니다..

 

전기밥통의 밥이 다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늘 봐 왔던 거지만.. 새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 참 좋아졌구나.. 옛날에 아침 밥 하느라 불 땐 나무 연기로 온 동네에 안개처럼 퍼런 연기가 고였었는데..

도시 사람이지만 어릴 때 할머니 품에서 자란 터라... 그런 시골아침 풍경이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별안간 예전에 읽었던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목은 모르지만 책 모습을 알기에 책장 여기저기 훓어 보니 눈에 보이더군요..

 

그새 밥상차려 기다리는 마누라의 짜증 섞인 소리 아랑곳없이 예전에 읽고 빙그레 웃었던 글을 오전 내 자판기 두들겨 필사 합니다.

이제 이런 글을 읽고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세대들이 점점 늙어 가고 있으니.. 앞으로 올 세대들이 그리 이해를 할 수가 있을까요... 요즘은 시골 애들도 도시 애 못지않게 예전의 일들을 알지 못하지요..

 

그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김용택 시인의 진메 마을을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이아침에 불쑥 솟아납니다..

진메 마을이나 제 어릴 적 할머니 마을이나 진배없겠지만..

 

그리운 건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그립다는 이야기겠지요.. 소쿠리 나뭇가지 받쳐 놓고 참새 잡던 .. 저물 녁 둔덕에서, 어린 마음에 엄마 보고 싶어 눈물짓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온 할머니가 앞치마로 눈물을 닦아주던..

할머니가 알고 있던 온갖 이야기에 빠져서 밤새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던..

군불 땐 방안에 퍼지던 메주 말라가는 냄새..

아련한 추억만 가득한 늙은 마음이 이 글 몇 줄에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행복한 아침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벌이..   (0) 2016.04.08
자이데나 비아그라 시알리스.......  (0) 2016.03.28
오랜만에....  (0) 2016.02.13
인연 맺음  (0) 2016.02.04
簦 鹳 雀 楼  (0) 201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