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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 뜰에 꽃을 풀어

유유(游留) 2020. 6. 8. 18:49

동편 뜰에 꽃을 풀어

 

불타는 혀를 내밀어

우리는 사랑을 약조했다.

사랑의 둘레는 축축하다

 

첫날에는 안개를 부르고

둘째 날

동편 뜰에 꽃을 풀어

축축한 홍매화 가지를

이승 밖으로 내밀기도 했다.

셋째 날

세 번 절하고 세 번 운다

울어도 눈물이 흐리지 않을 때

살아 있어도 귀신이다.

당신은 안아 줄 몸이 없는 情人

 

아픈 계절은 어떻게

꽃잎으로 깃드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첫정으로 스며드는지

곰팡이 핀 눈동자

 

매화는 분홍빛 곡조로 핀다.

 

 

-서 안나(1965~)-

 

 

 

*****************************************

요약하자면 삶은 '사랑의 슬픔' 쯤 됩니다.

사랑의 '사흘'쯤 됩니다. 첫날은 '안개'의 날,

흐리고 오리무중입니다. 그래야 사랑이지요

끝을 지워버린 길의 시작!

둘째 날 '동편 뜰' 처럼 찬란합니다. 담 밖

으로까지 뻗어 핀 '홍매'처럼 그 타고난

바의 피어남에 두려울 것 없습니다. 그리

고 셋째 날 '안아줄 몸이 없는 정인'으로 돌아

섭니다. 죽음 혹은 기타의 까닭이 있지요

끝내 비극 같지만 적절합니다. 괜찮습니다.

사랑으로 으스러진 삶이니까요. 으스러질 것을

아는 직업, 혁명가(개혁사)가 나오는 까닭도 실은

그 사랑의 실체를 알아차린 까닭입니다.

 

'홍매'가 어쩌면 사랑 최후의 '곰팡이 핀 눈동자'로

부터 싹터온 꽃으로 읽히니 더욱 붉습니다.

지난봄의 그것들을 다시 불러내 한참을 바라봅니다.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17) (시인. 한양여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A30면 오피니언 하단 2020년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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